"본질주의적 형이상학에 도전 … 다윈 혁명은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흐려놓았다" (교수신문 2015 9 28)
장대익 교수의 ‘다윈 『종의 기원』의 지성사적 의미'_최익현 기자
최근 외신에 따르면, 최고 300만 년 전에 살았던 새 인류 ‘호모 나레디’ 화석이 발견돼 진화학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고인류학자인 이상희 인디애나대 교수 또한 최근 출간한 『인류의 기원』에서 진화가 우연의 결과라고 지적했다. 이렇듯 ‘인류 진화’를 둘러싼 새로운 주장이나 학설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 기원에 다윈의 『종의 기원』이 있다면 어떨까. 지난 19일(토) 진행된 ‘문화의 안과 밖 시즌2’ 고전읽기 33강은 이 흥미로운 주제, 즉 다윈의 『종의 기원』을 좀 더 친근하게 풀어낸 강연이었다. 장대익 서울대 교수가 진행한 「다윈의 『종의 기원』의 지성사적 의미」가 그것이다.
장 교수는 다윈의 『종의 기원』이 당대의 본질주의적 세계관을 거부하면서 ‘개체군 사상’을 일궈냈다고 지적하면서 “이 사상은 종의 불변성을 믿는 기독교적 전통과 종의 이상형(ideal type)을 상정하는 플라톤적 전통 둘 다에 잘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다. 다윈 혁명은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흐려놓았다”라고 설명해냈다. 다음은 장 교수의 강연 주요 대목을 발췌한 내용이다.
1. 『종의 기원』의 논증
1859년 11월 24, 드디어 『종의 기원 (Origin of Species)』으로 흔히 알려진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 또는 생존투쟁에서 선호되는 품종의 보존에 관하여』 초판이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다. 『종의 기원』의 처음 시작은 결코 우아하지는 않았다. 동물 육종사와 사육사가 인공 교배를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개체를 어떤 방식으로 얻어내는지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다윈은 육종사들의 암묵적 지식에서 두 가지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인공 선택에서 힌트를 얻은 자연 선택의 힘이고 다른 하나는 부모의 형질이 자식에게도 전달된다는 원리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이런 대물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다만 자연계에는 같은 종 내에서도 수많은 변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종의 기원』의 모든 지면은 이렇게 자연선택이라는 종 분화 메커니즘을 향해 조금씩 천천히 진화하고 있었다. 사실 종이 진화한다는 개념은 다윈이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 개념을 제시했을 당시에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다윈의 독창성은 어디에 있었는가. 첫째로 그것은 진화의 과정이 어떻게 일어나는가에 대한 주요 기제(mechanism)로서 자연선택을 내세웠다는 점이다. 그는 이 선택 과정을 통해 개체들 간의 차별적인 생존과 번식이 일어나며 그로 인해 생명이 진화한다고 생각했다. 『종의 기원』에서 제시된 자연선택론은 과학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이론 중 하나이지만 동시에 초등학생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논리 구조를 갖고 있다.
- 모든 생명체는 실제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수의 자손을 낳는다.
- 같은 종에 속하는 개체들이라도 저마다 다른 형질을 가진다.
- 특정 형질을 가진 개체가 다른 개체들에 비해 환경에 더 적합하다.
- 그 형질 중 적어도 일부는 자손에게 전달된다.
이 조건이 만족되면 어떤 개체군 (population) 내의 형질들의 빈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게 될 것이고 상당한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종도 생겨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다윈이 제시했던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핵심이다. 생명의 다양성과 정교함은 지식의 거인들에게도 하나의 퍼즐이었다. 다윈은 이 퍼즐을 제대로 푼 첫 번째 과학자였다. 그의 공헌은 다음의 두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자연선택이 진화의 주요 메커니즘이라는 사실을 밝힌 점, 그리고 종의 진화를 생명의 나무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사실, ‘자연선택’이 다윈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돼 있어서 후자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덜 강조되곤 한다. 하지만 생명의 나무야 말로 다윈의 혁명적 사상이 실감나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진화 패턴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다윈에 의해 사다리 모형에서 나무 모형으로 변화됨으로써 우리는 동물원의 침팬지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결코 인간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이해하게 됐고 현시점에 최고로 잘 적응한 종이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라고 했던 오만함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됐다.
2. 『종의 기원』 그 이후: 쇠퇴와 부활
하지만 자연선택 개념은 다윈의 독창적인 생각이었던 만큼 비판도 많았다. ‘자연선택’이란 개체가 자신이 가진 변이 때문에 다른 개체들에 비해 생존과 번식에 더 유리해져 다음 세대에 더 많은 자손을 남기는 과정이다. 하지만 비판자들은 무작위적인 변이에 작용하는 자연선택 메커니즘만으로는 기막히게 적응한 사례들을 잘 설명할 수 없다고 불평했다. 이러한 비판의 포문은 라마르크주의자들이 먼저 열었다. 또한 ‘定向진화설’도 자연선택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게다가 다윈은 유전현상에 대해 입증되지 않은 ‘범생설’과 ‘혼합유전설’을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견해에 따르면 개체들 사이의 차이가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들어 결국 종분화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다윈으로서도 심각한 문제였다.
영국의 진화론 역사가인 피터 보울러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까지를 ‘다윈주의의 쇠퇴기’라고까지 부른다. 때마침 적자생존 개념을 인간 사회에 적용해 빈민들을 냉혹하게 몰아붙였던 스펜서의 사회다윈주의 (social Darwinism)은 다윈의 원래 이론마저도 곤경에 빠뜨렸다. 그러나 추락하는 다윈을 구원한 이는 오히려 그를 궁지에 몰아넣은 유전학 분야에서 나왔다. 유전학의 아버지 그레고어 멘델. 그 유명한 멘델의 완두 실험이 세상의 빛을 본 후, 다윈이 쩔쩔맸던 유전 문제도 돌파구를 찾았다. 멘델은 입자처럼 서로 섞이지 않는 유전물질이 다음 세대에 독립적으로 유전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곧 완두의 껍질처럼 명확히 구별되는 불연속적 형질에만 적용된다고 비판받는다. 이에 현대 통계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날드 피셔(1918)는 사람의 키와 같은 연속적인 변이들도 멘델의 유전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음을 통계적으로 보였다. 영국의 유전학자 J.B.S. 홀데인은 후추나방 색깔의 진화를 관찰함으로써 피셔의 예측모형을 경험적으로도 입증했다. 이로써 수많은 연속적 변이들에 작용하는 자연선택의 힘이 검증됐고, 개체군의 유전자 빈도 변화에 초점이 맞춰진 진화론이 탄생했다.
자연선택론의 이런 역동적인 발전은 생물학계 내부의 치열한 논쟁들을 통해 진행돼 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난 150여 년 동안 유전학, 분자생물학, 분류학, 생태학, 그리고 발생학 등이 진화생물학과 함께 발전하면서 진화의 본성에 대한 견해들도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치열한 논쟁과 이론의 수정은, 통념과는 달리, 좋은 과학의 징표다.
3. 『종의 기원』의 철학적 함의
다윈의 진화론은 코페르니쿠스의 혁명 이상으로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인류의 생각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다. 첫째, 인간이 생명의 최고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다른 동물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인간중심주의를 배격했다. 둘째, 놀라운 적응들로 가득 찬 자연세계의 존재를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던 자연신학 (natural theology) 전통을 비판했다. 셋째, 자연세계가 정확하게 구획돼 있고 각 구획마다 고유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본질주의 (essentialism)를 거부했다.
한 두 개의 원시 생명에서부터 지구 위의 모든 생명이 가지를 치듯 분기돼 왔다고 보는 다윈의 진화론은 자연 세계에서 인간의 지위를 최고의 자리에 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다윈은 자신의 이론이 인간의 위치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와 함께 갈 수 없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엄청난 반발을 두려워한 나머지 인간의 진화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말을 아꼈다. 그가 『종의 기원』(1859)을 출간한 지 10년 뒤에야 인간의 진화를 본격적으로 다룬 『인간의 유래』(1871)를 내 놓은 데는 그런 속사정도 있었다.
다윈의 진화론이 세계관에 미친 두 번째 충격은, 정교하게 적응돼 있는 자연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더 이상 지적인 신 (intelligent god)을 상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마지막으로, 다윈의 진화론이 플라톤 이후로 존재론의 왕좌를 지켜온 본질주의적 형이상학에 어떤 도전이 됐는지를 생각해보자. 간단히 말해 본질주의 (essentialism)는 자연세계가 어떤 구분된 본질들로 정확하게 구획돼 있다는 견해다. 하지만 다윈의 진화론은 이런 본질주의적 세계관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변이들 (variations)은 다윈의 자연선택이 작동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인데, 다윈은 자연이 개체군 내의 이런 변이들을 선택적으로 보존함으로써 종분화가 일어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즉, 개체군 내의 구성원들이 서로 이질적이어야 생명의 진화가 가능하다는 논리이다. 개체군 사상은 인간과 동물의 연속성 주장과 더불어 다윈 당대 및 이후의 존재론 혹은 세계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사상이 종의 불변성을 믿는 기독교적 전통과 종의 이상형 (ideal type)을 상정하는 플라톤적 전통 둘 다에 잘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다. 다윈 혁명은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흐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