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를 모르는 종교, 가치를 모르는 과학을 비판하다
양도웅 기자_교수신문 (2018 10 29)
과정 신학의 최고 석학 존 캅(John Cobb_前 미 클레어몬트신학교) 교수의 과학과 종교에 대한 물음과 답
“과정 철학은 실재를 고정된 실체가 아닌 사건으로 바라보며, 이 과정에서 존재 간의 상호연관성을 강조한다. 존재는 매 순간 경험을 통해 타자와 환경의 영향을 수용하면서 새로움과 가치를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전진한다. 과정 신학(Process Theology)은 이런 변화의 한계이자 원동력이 신이라고 설명한다.” 지난 5일 출간된 존 캅 교수의 『지구를 구하는 열 가지 생각』을 엮고 옮긴 한윤정 씨의 설명이다.
‘생태문명의 전환을 위한 종교와 과학의 대화’란 주제의 강연에서 캅 교수는 “종교적인 사람들은 종종 잘못되고 해로운 믿음과 실천에 집착하며 종교의 이름으로 비판에 저항합니다”라고 지적했다. 종교를 핑계로 변화에 저항하는 종교인들을 강하게 비판한 것으로, 특유의 과정 신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줬다. 또한, 종교보다 변화에 열린 자세를 가진 것으로 여겨지는 과학계에서 여전히 16~17세기에 정립된 세계관을 유지하는 과학자들이 있다며, “이제는 변화할 때”라고 역설하기도 했다. 이런 비판에서 알 수 있듯이,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태도’는 존 캅 교수가 가장 비판하는 지점이다. 하지만 ‘신=보편적 진리’를 긍정하는 신학자로서 그가 마냥 변화만을 외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신학의 반대편에 있는 과학에서 가치에 대한 탐구가 더 심화되기를 바란다. 그가 말하는 변화와 가치, 과학과 종교는 대체 무엇일까? 그의 강연문을 발췌 [이주형 한신대 종교와과학센터 연구원 번역] 소개한다.
"이런 종류의 과학과 종교를 거부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배운 것을 버리지 못하고 중요한 변화에 저항합니다. 우리의 우선순위를 재정리해야 하는 정보는 환영받지 못합니다. 우리의 현재 신념들을 종교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종종 우리의 저항을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는 것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듭니다.
게다가, 종교적 신념들은 종종 면밀한 검토를 용납하지 않는 설명들을 포함합니다. 그것들은 실체가 매우 불분명한 힘이나 행위자들을 사실로 가정합니다. 좀처럼 실현되지 않을 것 같은 기대를 하게 합니다. 사람들을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로 향하게 합니다. 더욱 종교적으로 이러한 신념이 유지될수록, 더 많은 생각이 왜곡되고, 그 행동은 이 세계의 실질적인 필요와는 더 무관해질 것입니다.
과학과 종교가 적대적이었다는 생각에 반대한 뒤, 저는 지금까지 많은 과학자와 종교인들의 입장이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보여드렸습니다. 과학자들은 종종 가치들이 이 세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부인하고 그것들에 주목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종종 잘못되고 해로운 믿음과 실천에 집착하며, 종교의 이름으로 비판에 저항합니다. 이런 과학자들과 종교인들은 서로 충돌합니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과학과 종교를 거부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사람들이 자연계를 소중하게 여기고, 너무 심하게 피해를 준 보금자리를 보존하고 새롭게 하는 데 헌신하도록 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고 인식하는 과학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의 행동 방식과 그리고 우리의 건강한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에 관해 가치관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해석을 해 준다는 점을 진지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지상의 보금자리를 보존하고 새롭게 하는 데에도 동일하게 헌신할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자기를 비판하기를 요청하는 종교가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과학이 이러한 종류의 헌신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드는 기계론적인 세계관에 묶여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믿음에 대해 자기 비판적으로 되는 데 실패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그런 식으로 언어를 사용하도록 선택한다면, 우리는 지금 과학이라고 종교라고 부르는 둘 다의 것 이상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모두가 필요로 하는 것은 과학과 종교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과학은 증거에 개방적이고 그 증거가 뒷받침하는 것에 자신을 스스로 맞춘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과학 연구가 아직도 종종 과학이 자신과 동일시하는 17세기 세계관을 지지한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그 세계관은 우리가 양자 이론이나 상대성 이론에 대해 알기 전에 나타났고, 어느 것과도 잘 맞지 않습니다. 그 증거는 동물과 식물, 세포, 분자, 유전자 그리고 양자들은 기계와 같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변화할 때입니다. 저는 학계의 그렇게 많은 사람이 시대에 뒤떨어진 이 세계관에 집착하는 것은 실제로 종교적인 문제라는 것을, 변화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알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서 비판을 계속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대 지배적인 사고방식과 격돌한 종교 창시자들
다시 한번, 저의 초점은 종교적인 측면에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종교”라고 간주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대부분은 25세기 전 위대한 사상가들까지 올라갑니다. 일부는 그리스, 중국, 인도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 종교”라고 부르는 것들은 이스라엘에 있었습니다. 이 창시자 가운데 누구도 위에 언급한 의미에서 "종교적"이지 않았습니다. 매우 대조적으로, 그들은 혁명적이었고, 추종자들에게 그 시대의 지배적인 사고방식에 대항하여 혁명을 지속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깨달은 존재 또는 부처인 고타마(Gautama)는 첫 번째 그룹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입니다. 당시의 그의 사상과 실천은 완전히 급진적이었습니다. 오늘날까지 그것은 급진적인 것으로 남아있습니다. 불교의 깨달음은 모든 집착으로부터 해방시킵니다. 따라서 그것은 오늘날 “종교”를 매우 긴급하게 요청되는 신념과 헌신에 저항하게 만드는 것과 정확하게 반대 방향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불교도들에게 파괴적인 의미에서 "종교적"이 되는 것을 그만두라고 요청하는 것은 더욱 진지하게 그들 자신의 믿음을 가지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많은 불교도가 이미 이 활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불교가 "종교"의 한 사례라면, 종교는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자신을 스스로 불교도라고 여기는 많은 사람이 여전히 도움이 되지 않는 믿음과 실천에 견해를 같이하고 있지만, 참으로 독실한 불교도들은 이미 필요한 일에 큰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역사가들은 아브라함 전통이 고타마와 거의 같은 시기에 "예언자적" 전통으로 나타났다고 이해합니다. 많은 사람의 어휘 속에서 “예언자”라는 단어는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을 의미하게 됐습니다. 고대의 히브리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의 행로를 지속한다면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종종 경고했습니다. 때로는 예언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특수성을 갖게 됐습니다. 다른 예언들은, 비록 이스라엘은 전투에서 패배하고 지도자들은 멀리 보내지겠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할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확신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이 예측을 포함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의 글들이 성경에 보존된 예언자들은 넓은 의미에서 그들의 예측이 옳다고 드러난 사람들이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예언자들을 구별하는 것은 성공적인 예측이 아니라 그것들이 만들어진 기초입니다. 그 시대 대다수의 히브리인은 그들의 하나님은 매우 강력하고, 또 그들이 올바른 제물을 드리고 율법을 따른다면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의 예언자들은 종교 예식과 동물 희생 제물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정의였으며, 그것은 특히 가난한 자를 착취하고 과부와 고아를 학대하는 것을 종식시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당시의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왕이 충성의 최고 대상이었던 것에 비해, 선지자들은 정의의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요구했고, 그 관점에서 그들은 종종 세상의 통치자들을 비난했습니다. 때로 우리는 “성서의 예언”을 “권력을 향해 진실을 말하는” 위험한 행동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수 세기 후에는 예수와 모하메드가 예언적 전통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과 이슬람교도들이 위대한 창시자들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한, 그들은 오늘날 부와 권력이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비판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오늘날 우리나라의 최고 부자(superrich)들과 힘없는 가난한 자들 간의 계속 증대하는 격차가 모두를 재앙으로 이끌게 될 것이라고 예언할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정의 기준에 의한 것인지 판단하는 것은 분명히 우리에게 필요한 변화를 막는 그런 종류의 신앙심을 지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종류의 신앙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앙심은 전형적인 "종교" 공동체의 내부와 외부에서 모두 발견됩니다. 이 해로운 신앙심을 비판하는 근거는 종교 자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